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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태지와 아이들
    그때 이야기 2023. 5. 21. 09:16

    한국 가요계에 혁명과 파장을 일으키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3월에 결성된 3인조 음악 그룹으로, 한국 가요계 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영미권 대중음악계의 비틀즈나 너바나 혹은 마이클 잭슨에 못지 않다.
    그렇기에 오늘날 한류 열풍의 중심에서도 중심인 "K-POP"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글로벌 대중문화음악예술과 뮤지션이라는 종합적인 개념에서의 그 첫 시작의 문을 열었다고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마 동시대의 모든 대중들 또한 이 의견에 찬성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역사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임백천(방송인 겸 가수)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서태지는 시나위가 해체된 이후, 정통 락 뮤지션으로서는 드물게, 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생소하던 랩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랩 장르를 바탕으로 한 획기적인 댄스 그룹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나이트클럽 업소에서 활동하는 무궁화 밴드의 멤버로 있을 때 춤을 배우기 위해서 소개받은 양현석에게 자신이 작곡하고 있던 음악들을 들려주게 된다.

    1년간의 군 생활 뒤 의병제대한 양현석은 서태지가 들려주었던 음악들을 잊지 못해 제대 후 다시 서태지를 찾아오고 때마침 댄서들을 구하고 있었던 서태지와 합이 맞은 둘은 듀엣을 결성하기로 하고 녹음까지 완료했으나, 추가 멤버를 들이기로 하고 수많은 이태원동 댄서들을 둘러보다가, 박남정과 프렌즈로 활동했었던 이주노를 최종 멤버로 영입하면서 3인조 댄스 그룹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주노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는 이주노의 목소리가 없었다.
    이 사실을 양현석이 20년 만에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다.
    이 때문에 이 항목 상단부에 있는 영상에서 보듯 방송에서 사용한 '난 알아요' 음원은 앨범 음원이 아니라 이주노의 목소리까지 덧입힌 버전이며, '환상속의 그대'는 아예 여러 버전의 믹스를 새로 발매하여 활동했다.
    사실 양현석은 이주노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었기 때문에, 팀내 불화가 생길까 염려되어 받아들일까말까 망설였으나 그래도 같은 댄서 출신인데 통하는데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이주노를 팀에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인 서태지가 리더로 활동한 그룹인 것도 있어 팬들 중에선 “서태지와 어른들”이라고 간혹 불리기도 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신드룸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 취향의 댄스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단순히 트렌드의 변화와 차원을 달리하여, 영미 팝이 한국 음악, 특히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지던 시절에 이들은 영미 팝 가수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지고 있던 영향력, 특히 "10~20대의 지분"을 송두리채 떼어 한국 가요로 가져오는, 혁명적인 역할의 선봉이 된다.

    또한, 현진영과 같이 "한국어는 구조상 랩이 불가능하다."라는 당시 전문가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댄스와 랩을 대중화시켰다. 2집 하여가에서 최초로 국악과 흑인음악(힙합), 헤비메탈을 접목하고, 3집에서는 랩 메탈, 4집에서는 갱스터 랩 등의 앨범을 들고 나올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도입,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직전 상황의 가요 톱텐에서는 태진아가 <거울도 안 보는 여자>로 1위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음악색을 보여주던 조용필, 김연자 등의 성인 가요 네임드들이나 신승훈, 변진섭과 같은 세련된 발라드 가수들, 김수철, 신해철, 현진영 등 해외 뉴웨이브를 받아들이던 음악인들도 음악산업에서 힘을 썼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대중매체라 할 수 있는 TV보다 전문적 영역에서의 공연을 더 많이 했기에 당시 TV의 뒤쳐진 문화는 당시 10대·20대가 따라가고 싶던 힙합, 현대적인 댄스팝뮤직을 비롯한 "세계적인 트렌드"와의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80년대를 지나 민주화가 된 90년대가 되었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기지개를 켠 상황에서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고 싶은 구매력까지 갖춘 10~20대들은 있는데, 만족시킬 만한 한국어 콘텐츠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랩뮤직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1990, 91년 바로 이듬해인 1992년도에 '한국어 랩'과 '회오리춤'을 들고 서태지가 나타났다.
    10대, 20대들이 원하던 세계적인 트렌드와 한국 음악 사이의 간격이 기적과 같이 좁아지고 억눌려져 있던 젊은층의 수요가 한꺼번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단순히 랩 음악을 한국에 반짝 유행시킨 정도가 아니라, 이로 인해 대한민국 가요계의 판도를 현대식 댄스뮤직과 랩뮤직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 당시 문화적인 충격을 1990년대생 이후 세대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러한데, 라디오는 7개에 TV 채널은 지상파 5개 뿐이고,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도 없었으며 PC통신은 우선 PC 자체가 당시 단가가 지나치게 높아서 일반 가정이 구하기 매우 힘들었고 있어봤자 비싼 전화세가 문제였다. 신문 구독률이 여전히 70%대에 이를 정도로, 지면을 통한 정보 수집이 주류일 시절이었다. 민주화가 정착되었다고 하지만 사회 분위기 때문에 TV에서는 머리를 기르거나 염색한 남자도 못 나온다.
    한국 영화는 흔히 말해 "내 돈 주고 보기 아깝다."라는 수준이고 방송에는 트로트, 발라드, 템포만 빠른 정도의 댄스 가수 위주였다.
    그런데 해외 팝 뮤직을 보면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형형색색 다양한 패션을 갖춘 형, 누나들이 훨씬 더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을 하고 있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멋진 춤을 추고, 신선한 장르의 강렬한 노래를 부른다.
    발라드도 좋지만, 해외의 가수들처럼 젊은 사람들 구미에 맞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다행히, 점차 경제 수준이 좋아지면서 마이마이와 같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나 라디오 겸용 플레이어는 제법 보급이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예전보다 음악을 접할 통로는 많아졌다.
    90년대 이후 출생자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하자면, 물가대비 당시 카세트 플레이어는 지금의 닌텐도 스위치 가격 정도였고, 정품 카세트 테이프 앨범은 지금 물가 기준 대략 2만원 정도 수준이었으며, 레코더를 이용한 불법복제 테이프는 대략 5~7천원 정도 수준이었다.

    정말 집안 형편이 어렵다면 이정도 비용도 학생들에게는 버겁겠지만, 그렇다고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닐 정도로 플레이어 보급이 많이 이뤄질 시절이였다.

    또한 휴대용 플레이어를 구할 정도 수준은 되지 않는 집에도 TV나 라디오는 이제 가정당 적어도 1대는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많이 내려갔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은 TV나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휴대폰 및 삐삐가 부유층이나 직장인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늦은 저녁이 되면 친구와 집 눈치를 봐가며 집전화로 잠깐 대화를 하는게 전부였고, 저녁에는 가족끼리 둘러앉아 TV를 보고, 밤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 정도가 문화생활의 전부였다.

    1980년대 들어 영미의 팝음악은 다양한 장르의 탄생과 마이클 잭슨 등 대스타의 등장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이들 영미권 팝스타의 인지도는 특히 10~20대에게 대단해서 동네 레코드샵에서 빌보드 복사판을 나눠줄 정도였고 유로댄스 생소한 가수의 내한공연에도 만석을 이룰 정도였다.
    인터파크 같은 온라인 예매도 없었으니, 시내 대형서점까지 한나절을 잡고 직접 버스타고 가서 티켓을 사오거나, 은행을 통해 입금예매하는 게 전부였던 시절에도 그정도 열의로 공연을 찾아다니는 음악 팬들이 증가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국내 음악시장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공윤의 검열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장르의 탄생보다는 정부가 지원하는 건전가요나 기성세대풍의 기존 음악 위주로 형성되었다.

    즉, 세계의 유행을 좇아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일 토양과 수요는 이미 1980년대 초중반부터 무르익었고, 경제적으로 구매력을 갖춘 10대들·20대들이 생겨났으나 한국 음악계가 거기에 맞춰주지 못한 것.
    80년대, 90년대 초의 Wham!, Duran Duran, A-Ha, 바비 브라운 등등. 특히 그 당시의 10대 청소년들에게 뉴 키즈 온 더 블록(이하 NKOB)의 인기와 파괴력은 엄청났다.
    서태지 데뷔 바로 한 달 전의 NKOB 내한 당시 수십명이 부상당하고 깔려죽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져서 공연이 중단될 정도였다.

    오죽하면 10~20대 취향 컨텐츠 부족은 당시 합법적으로 수입이 금지되어 일반인들은 접하기 힘든 J-POP까지 손을 뻗히면서 쿠와타 케이스케 등 당대 일본의 유명 음악 또한 1980년대 후반 암암리에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했다.

     

    참고로 그 시절은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더 컸을 때이며 인터넷 같은 정보 매체가 부족했을 때였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10대·20대 취향에 맞는 그러면서도 서양 사람들의 전유물로만 생각되었던 랩 등이 들어간 세련되고 독특한 음악과 춤을 선보였던 그 신선함과 파괴력은 엄청났다.
    NKOB나 듀란듀란같은 영미권 팝 아이돌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통째로 떼내어 한국인이 가져온 기념비적인 사건인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아예 없었던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에도 댄스 곡을 했던 가수들이 꽤 있었다. 나미, 민해경,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은 아이돌의 효시라 볼 수도 있고 빠른 댄스 음악을 하고 있었다.
    이들도 분명히 의미가 있고 진보가 있는 노래를 발표했고 무대를 보여줬다. 그리고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데뷔했고 절정의 기량을 가진 현진영도 있었다.

    # 한 블로거의 서태지에 관한 포스팅인데, 그는 서태지를 가장 위대한 한국 가수로 꼽고 있다.


    서태지 이전과 이후는 하나의 단층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라디오에서 처음으로 난 알아요를 들었을 때는 평범했지만, 화면에서 봤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무슨 장르를 도입했다는 말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이 별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흑인음악이나 댄스음악을 도입했던 것은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니고 먼저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괴력이 달랐다.

    가장 좋은 예시가 한국형 흑인음악을 시도한 현진영이다. 당시 흑인음악에 관한 탁월한 이해도, 서태지 이상 가는 가창력, 그리고 한국 역대 최고의 댄서로 꼽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을 만큼 비교도 되지 않는 춤 실력을 가졌으며 서태지보다 상당히 먼저 데뷔하기까지 했다.
    현진영과 와와 시절 그는 최고의 댄서인 구준엽과 강원래를 양옆에 거느리고 뛰어난 테크닉과 절정의 운동능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서태지의 장점이라고 흔히 말하는 흑인음악 도입도 그가 먼저 했다. 꽤 잘생기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흔히 말하는 서태지의 성공조건과 같다.
    그럼에도 그는 서태지와 비슷한 급의 파급력은커녕 1류 인기가수라고 하기에도 어려웠고 약간 이름을 알린 정도였다.

    그가 절정의 인기를 끌게 된 것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 현진영 go 진영 go 등을 통해 서태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대를 보여주면서였다.
    완성형 가수로 데뷔한 현진영의 가창력과 춤 실력은 짧은 시기 사이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서태지 이후의 현진영 무대 구성이었다. 서태지 이전 현진영의 야한 여자, 슬픈 마네킹 등의 무대와 서태지 이후의 현진영이 보여주는 무대를 보면 결코 동일한 가수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나미와 붐붐도 인디언 인형처럼이 큰 인기를 끌었고 흑인음악 도입, 댄스, 붐붐의 랩, 쟈넷 잭슨의 영향을 받은 의상까지 꽤 인상적이지만 가요계의 조류를 바꾸고 그러지는 않았다는 것에서는 서태지 이전의 현진영과 와와와 비슷하다. 이쪽도 글로 늘어놓는 조건으로 따지면 서태지와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서태지의 업적으로 말해지는 랩 역시 1990년에 인기가수였던 신해철이 방송무대에서 영어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특이함 때문에 한국 가요의 계보에서 잘 말해지지 않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재조명되는 소위 탑골 GD 양준일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흑인음악을 하고 춤도 추는 양준일조차도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무대는 전혀 다르다. 시대를 엄청나게 앞섰다며 양준일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는 무대들은 죄다 서태지 이후의 무대다.

    흔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조건이라고 불리는 여러 조건들이 있다. 그렇지만 서태지 이전에도 그것을 갖추고 있던 다른 가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요계를 재편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고, 그들이 등장한 이후에는 블로거의 표현대로 단층이라고 할 정도의 차이가 생겼고,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가 분출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례를 맞았기 때문에 더는 단순해질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모든 모습, 그리고 무대 바깥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기존 가수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단순히 적시에 적절한 음악 장르를 한국에 도입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젊은 가수는 자기 색깔이 확고한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단층 아래에서 도태되었고, 자기 색깔을 지닌 가수들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형식으로 재편된 모습이 현재의 K-POP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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