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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이 미선이 사건그때 이야기 2023. 5. 8. 07:48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란
2002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여중생 두명이 주한미군 군인이 조정하던, 미 육군 장갑차 M60 AVLM 공병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고 및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일컫는다.
피해 학생들의 이름을 따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고 불리며, "미군 장갑차 중학생 압사 사건" 또는 "여중생 압사 사건"이라고도 한다.
결론을 우선 말하자면, 주한미군의 과실치사 사고라고 할 수 있지만, 사고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건"으로 발달 되었다.
이 사건의 명칭은 처음에 설명하였듯, 미 육군의 훈련 도중 군용 차량에 두 여중생이 압사당한 사건과 그에 대한 전국민적인 반미 시위를 포함한다.
사건 발생
2002년 6월 13일에 광적면 효촌 2리에 살고 있던 신효순 양(당시 14살)과 심미선 양(당시 14살)은 국도를 따라 언덕을 넘어 덕도리 쪽으로 300m만 가면 친구가 사는 "초가집"이라는 이름의 식당에 모여, 의정부에 놀러가기로 하였다.
학생들은 졸업생 10명(그 중 여학생은 6명)에 불과한 효촌초등학교를 나온 동창으로, 다음날은 효순 양의 생일이기도 해서 여학생 5명이 모이기로 약속했던 날이였다.
사고가 난 길은 편도 1차로(폭 3.3m)에 불과한 지방도였으며, 현장은 법원리(서쪽)와 덕도리(동쪽) 사이의 골짜기로 급경사에 곡각지로 남쪽은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들어 별도 인도가 없어 차가 온다면 사람이 피할 곳이 없는 길어었다.
서쪽의 법원리에서 한참 내리막을 달려오던 차가 마을 앞에서 갑자기 도로 사정이 바뀌어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오른쪽(남쪽)으로는 산을 기고 휘어져 올라간다.
이날 낮 10시 30분 경, 두 여학생은 마을을 나와 친구의 집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44공병대대 소속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법원리 쪽에서 내려와 약간 왼쪽으로 틀어 막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차량 행렬은 선두 안내차량 1대, 병력 수송 장갑차, 그 뒤로 사고차량, 일반 공병궤도 차량 3대, 후미 안내차량 1대 였다.
이때 맞은 편에서 M2/M3 브래들리 기갑 전투차량 5대가 덕도리에서 무건리 훈련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사고가 난 도로의 폭은 3.3m 정도 인데 반해 사고차량의 폭은 3.65m였다.
사고 차량이 마주오던 차량과 무리한 교차 통과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갓길을 걷도 있던 신효순 양과 심미선 양을 치어 숨지게 하였다.
사고가 난 도로는 인도도 따로 없는 편도 1차선의 좁은 도로로, 주민들은 평소 갓길을 인도 삼아 통행해 오던 도로였다.
2002년 6월 13일 사고가 난 이후 유족들은 "당시 사고 차량의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은 데다 마주오던 차량과 무리하게 교차 통행을 시도 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는 이미 예견 된 살인 행위 였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미군 당국은 사고 당일 미 8군 사령관의 유감의 뜻을 전하고, 다음 날인 6월 14일에는 미 보병 2사단 참보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고,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조의금 명목으로 100만원, 이후에는 보상금으로 각각 2억원 정도를 보내는 등 사고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조의금을 보상금으로 해석한 유가족들이 2사단장을 만나고자 항의를 계속하자, 미군 측은 15일 장례식 부터 먼저 치르면 사단장과 면담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지만, 번역 상의 실수를 이유로 약속은 파기 되었다.
같은 달인 19일에는 미 육군 2사단 측의 한미 합동 조사 결과가 발표 되었는데, 이 사건에 대한 합동 조사 결과는 "이번 사고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인 사고"였다고 발표 하였는데, 즉 과실사고라는 것이었다.
장갑차 조총수 였던 마크워커 하사가 두 명의 여학생을 확인하지 못하였고, 전차장이였던 페르난도 니노 하사의 통신까지 겹쳐서 피치 못하게 사건이 발송했다고 했다.
또한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여중생들을 보긴 보았지만, 당황하여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당시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때라, 이 사고는 짤막하게 속보 형식으로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으로 보도 되기만 했고, 거의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상황이였다.
사고 다음 날에 치러진 "한국 대 포르투갈 전" 그리고 그 경기에 한국이 승리하여 16강에 첫 진출하면서 사고 자체가 완전히 묻히기도 하였다.
사고가 일어난 6월 하순부터 사고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던 의정부시 일대에서는 모자이크를 하지 않은 사고 사진을 의정부역이나 시내광장에서 볼 수 있었다. 일부 대학교의 벽보에 사진과 함게 내걸리거나, 의정부와 양주시의 중/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사고를 낸 이들이 소속된 부대인 미 육군 제 2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의정부시 가능동 "캠프 레드클라우드"에서 산발적으로 집회를 벌이는 데 그쳤다. 사실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사고는 전국민의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재판 판결 결과
주한 미군 측과 유족들 간의 공방은 계속 되었고, 검찰 측 수사도 시원치 못한 데다 비판 여론이 점점 확대되자, 법무부는 7월 10일에 미군측에 재판권 포기요청을 한다.
근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왜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미국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였는가?
재판권은 피해자가 발생한 한국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이며, 2001년에 협정 조항 일부 개정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군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일본과 맺은 SOFA에 견주면 불평등한 협정이었으며, 특히 형사재판권 행사와 관련한 조항이 대표적 독소 조항으로 꼽혀오기도 하였다.
SOFA 22조 3항
미군이나 군속, 그 가족이 미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거나 공무중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미국이, 비 공무중에 한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한국이 1차적 형사재판권을 갖도록 한다. 또한 상대국의 재판권 포기 요청이 있을 때 1차적 재판권을 갖는 국가는 이를 호의적으로 고려한다.
SOFA 22조 5항
1차 재판권이 한국에 있는 범죄의 피의자가 한국의 수중에 있다면 미군 당국이 요청할 때 "인도해야 하고", 미군 당국의 수중에 있을 때 한국이 요청하면 "호의적으로 고려한다"SOFA 규정상 주한 미군들을 포함, 한국군은 물론이고 상호간 SOFA규정을 맺고 있는 모든 국가들은 훈련 중 사고, 즉 공무 집행과 관련된 범죄는 자국 측이 그 재판권을 가지고 일종의 치외법권의 형태를 보이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그 재판권을 한국 측이 가지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8월 7일 미군 당국은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재판권 포기를 거부하였다. 이걸 가지고 살인이 맞으니 은폐 혹은 미군들을 보호하려고 그랬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초에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도 SOFA 협정상 자국이 재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11월 20일과 22일 동두천 미군 기지인 캠프 케이시 내 군사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은 피고인 미 육군 부사관 2명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각각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다만 무죄 취지는 서로 달랐는데, 우선 페르난도 니노 하사가 당황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중생들을 본 것이 맞는 만큼 사고를 막지 못한 죄가 성립한다고 봤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그 사실을 조총수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으니, 처벌 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 하였고, 마크 워커 하사는 여중생들을 볼 수 없었고 관측병의 통보를 받아 움직이기에 사고가 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으므로 처음부터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실상 이 판결은 가해자에게 무죄판결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는 유가족과 한국인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결과 였으며, 마크 워커 하사의 변호사인 가이 워맥 조차 " 여중생들을 보지 못한 마크 워커 하사야 무죄가 맞지만, 막판에라도 여중생들을 보긴 봤었던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처벌을 받아 마땅했다"고 판결을 비난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5일 후 한국으로부터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로 출국하였는데, 출국과 동시에 "본의 아닌 사고에 유감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겨 유가족과 한국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11월 26일 드디어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특정 단체 주도 없이 인터넷을 통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촛불집회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한창 메신저들이 자리 잡아가던 시절인 만큼 넷상에서도 이 문제가 뜨거웠고, 온 네티즌이 지못미의 전신격인 이모티콘 ▶︎◀︎을 자기 아이디 앞에 붙이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그리고 당시 게임 제작사, 애니메이션 제작사등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자는 취지로 추모 이벤트 및 영상을 만드는 등 추모 열기는 더욱 확산되어 갔다.
11월 27일에는 주한미국대사가 조지 W. 부시 (전)대통령의 사과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12월에는 직접 전화로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이때 미국측의 사과는 "아이들이 희생되어 유감이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잘못했다"라는 표현이 아니였기에 이에 국민들의 반발을 사 반미 감정을 더 확산시켰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추모곡
피 묻은 운동화(안치환 8집)을 마지막으로 글을 이만 적도록 하겠다.
그날 너흰 무슨 말을 하며 걸어 갔을까
봉숭아 빛 두 뺨은 햇살 아래 반짝이고
어떤 꿈으로 하루가 설레었을까
얼마나 무서웠니
겁에 질렸니
탱크 바퀴 밑에 뒹구는 피 묻은 운동환
너희가 신고 갈 열다섯 살 희망이었는데
물방울 터지듯 웃던 고운 아이들아
어린 새처럼 파들대다 죽어 갔니
떠나라 이 땅에서
우리의 여린 희망 짓이기지 말고
이 땅에서 떠나라 피를 부르는 오만한 양키들아
얼마나 무서웠니
겁에 질렸니
탱크 바퀴 밑에 뒹구는 피 묻은 운동환
너희가 신고 갈 열다섯 살 희망이었는데
물방울 터지듯 웃던 고운 어린아이들아
어린 새처럼 파들대다 죽어 갔니
떠나라 이 땅에서 우리의 여린 희망 짓이기지 말고
이 땅에서 떠나라
피를 부르는 오만한 양키들아
떠나라 이땅에서
(미친 탱크여 떠나라)
우리의 여린 희망
(미친 탱크여 떠나라)
짓이기지 말고
이땅에서 떠나라
피를 부르는 오만한 양키들아
떠나라 떠나라 미친 탱크여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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